△ 서울 번동 드림랜드 왼쪽에 자리한 창녕위궁재사. 전통혼례식장으로 사용된다. jeon jeong hee ⓒ
보아라, 조선 선비의 기개를구한말 조선 선비의 정신을 드러내는 공간「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드림랜드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시 강북구 번동 93번지가 정확한 주소다.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어디에 있을까?
2003년 한 여름 창녕위궁재사를 찾아 드림랜드 앞을 갔을 때 그곳을 찾지 못해 적어도 두어 시간을 헤맸다. 드림랜드 입구 슈퍼와 간이매점을 운영하는 주인에게 『혹시 이 부근에 창녕위궁재사라고 모르십니까?』하고 묻자 창녕위궁재사라는 낯선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내게도 입에 익지 않은 「창녕위궁재사」라는 단어가 쉽게 들어오겠는가. 다시『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라는 설명을 곁들였지만 『글쎄요, 모르겠네요. 그런 게 있나?』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함께 간 중학교 1학년의 딸은 『아빠, 잘못 온 것 아닐까』하고 다른 곳으로 가볼 것을 권했다. 자료에는 분명 놀이공원「드림랜드 앞」이라고 되어 있으니 틀림없겠다 싶어 그곳을 지나는 나이든 주민에게 물어봐도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다.
이럴 땐 복덕방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사무소 개념이 아닌 나이 든 노인들이 소일거리로 열어놓은 복덕방 말이다. 그런데 첫 번째 복덕방은 문이 굳게 잠겼다. 아마 손님을 데리고 어디 월셋집이라도 구경시켜주러 갔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이웃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찾으니 30대쯤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번동 93번지」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고 말하자 벽에 붙은 관내 상세도를 살펴 주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93번지 표시가 없다. 난감하다. 자료를 내밀었다.
『일반 주택이 아닌 창녕위궁재사라는 곳을 찾습니다. 이 자료에는 드림랜드 앞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앞을 헤매고 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 한옥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몇 년을 이곳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들어봅니다. 』
다른 복덕방이나 공인중개사사무실을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인사를 하고 나오려 하자 뜻밖에 더 젊어 보이는 직원이 『혹시,드림랜드 앞에 한옥이 하나 있긴 한데 그거 아닐까요? 웨딩홀 건물이거든요』라고 말했다.
직감적으로 「찾았다!」싶었다.
창녕위궁재사, 화려한 놀이공원 시설에 둘러쌓인 「드라마 세트장」같은 초라함드림랜드 입장표를 끊는 정문 왼쪽으로 「드림랜드 전통혼례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ㄱ자 모양의 한옥 지붕이 보이고, 팔작지붕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이 닫혀 문 밖에서 이리저리 살피니 표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천(梧泉) 김석진(1843~1910) 선생이 경술국치의 울분에 못 이겨 자결한 순국 장소」라고 되어 있다.
옆문이 열려 그곳으로 들어서니 중부지방 한옥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ㄱ자 집 두 채가 우리 한옥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들었다. 다듬은 돌로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두 채의 집이 자리했다. 아래 마당에서 올라서려면 4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오른쪽 사랑채의 경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1575~1642) 의 별장으로 지어진 원형이 지금까지 용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소에서 항일우국지사 김석진이 자결을 했다.
좌측 건물은 1800년대에 건축된 재사로 재사 정면 안채는 해방후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자료에는 6.25 때 폭격으로 재건축됐다고 하나 후손 김균연씨(서울 창문여고 교장)는『9.28 수복 직후 폭격을 맞아 재사와 사랑채(오른쪽)의 일부가 파손되었을 뿐 원형은 옛 그대로이다』고 증언했다.
세도가 안동김씨가에 시집온 조선 순조의 둘째 복온공주창녕위궁재사의 내력은 이러하다.
안동김씨의 영향력은 19세기초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의 등장 후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외척에 의한 정치행태를 낳는다. 이러한 안동김씨의 권력은 흥선대원군조차 안동김씨로부터의 화를 피하고자 반정신병자 행세를 할 정도로 막강해 진다.
정조가 죽고 12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한 순조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는데 이가 바로 복온공주의 어머니 순원왕후이다. 순원왕후는 후에 익종이 되는 효명세자와 그 아래로 명온 복온 덕온 공주를 둔다.
창녕위궁재사는 바로 이 둘째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의 재사이다. 순조는 안동김씨 가문의 실력자 김연근의 아들 창녕위 김병주(金炳疇 1819~1853)를 부마로 맞았으나 그 딸이 불과 15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이곳에 능과 재실을 마련했다.
당초 이 재사와 이 일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신경진의 별서였으나 이후 병조판서,한성판윤을 역임한 무신 이요헌(1766~1815) 소유로 넘어왔다. 이요헌은 이곳에 삼벽정(三碧亭)을 이곳 짓고 시와 독서를 즐겼다. 그리고 복온공주의 묘소로 정해진 후 제실(묘막)이 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창녕위-복온공주 후손 김석진의 순국으로 이어지다재실 이전 이 지역은 신경진,이요헌 등이 소유한 정자가 있는 별장이었기 때문에 정자말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재실과 공주릉이 들어서면서 궁말 또는 공주릉으로 호칭된다.
정자말로 불리기 앞서는 「벌리」라 하였다. 벌리란 고려 시대 목(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도참설이 떠돌면서 목씨 성을 오얏나무 이(李)씨 성으로 보고 오얏나무가 무성한 이 일대에 벌리사(伐李使)를 두어 그야말로 오얏나무를 쳐냈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벌리(伐李)가 되었다가 나중에 번리(樊里)로 고쳐졌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지금의 번동의 유래인 셈이다.
한적한 재실에 지나지 않았을 이곳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후손이자 우국지사인 김석진(金奭鎭)이 이곳에 은둔 끝에 경술국치의 분을 토하고 자결하면서부터이다.
안동김씨 가문으로 안동에서 태어난 김석진은 철종 11년(1860년)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해 종실의 계보와 초상화,의복 등을 관리하는 종친부 관리로 일하다 홍문관,한성부 좌윤,광주부유수 등을 지냈다. 그리고 갑오개혁 때 설치된 궁내부 특진관을 시작으로 비서원,장례원 등에서 종실의 의례 등을 관장하는 벼슬을 거쳤다.
마지막 관직인 판돈녕부사 역시 돈녕부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예우하는 기관이었고 그는 돈녕부의 수장이었으므로 죽기 전까지 왕실의 권위를 지키는데 헌신했다.
이러한 그에게 1905년 을사조약은 경악할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즉각 상소를 올리고 조약을 날인한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등 5적의 처형을 주장하고 이곳 재사에 은둔을 시작한다.
일제는 이런 그에게 남작 제의를 하나 거절하고 오히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자 소유하고 있던 지금의 서울 한국일보 건너편 땅을 팔아 빚을 갚는데 보탰다고 전한다.
그러나 한번 기운 국운은 끝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로 이어지자 그는 재사의 사랑채에서 음독 자결로 항일의 뜻을 분명히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유림들은 그의 아들 김녕한(金寧漢 1878~1950)을 중심으로 그의 순국을 사표로 삼아 강연과 집회 등을 가지며 애국운동을 펼친다. 이제 재사는 전국 유림 제일의 성지가 되어 수만 명이 왕래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왜경은 유림 영수 김녕한을 감시할 목적으로 마을 어귀에 초소를 세워 그와 유림의 동태를 파악했다.
김석진과 김녕한 등 후손들 또한 복온공주릉 인근 사묘에 묻혔으나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번잡해 지자 후손들이 2002년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으로 이장을 한 상태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석진 선생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했다.
재사, 1950년 「번동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여『내가 나고 자란 곳은 재사다. 고조부께서 자결한 사랑채는 할아버지와 같이 잠을 자는 침실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집은 산속 외딴 집이었다. 지금 드림랜드 입구 보호수로 지정된 18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당시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어른 팔 둘레로 일곱 둘레에 달했다. 아쉽게도 6.25 때 폭격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후손 김균연씨의 증언이다. 6.25 발발 당시 경동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서울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이 재사를 접수해 인민위원회로 사용하면서 채석업을 하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인민재판에 회부됐다.
바지에 파란 줄을 한 내무서원, 빨간 줄을 한 군관 그리고 민청 사람들이 3대를 재판에 회부하고 『당신들이 인민의 고혈을 착취한 지주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할아버지가 『우리는 농사를 지어먹고 산 죄 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김씨는『그들은 재사 아래 방죽 위에서서 이같이 심문했고 나와 우리 가족은 방죽 위에선 그들을 올려다보며 재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마침 전쟁 초기이고 인민에 과도한 해를 끼치지 않도록 교육받은 그들이었기에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재판을 속개하겠다』며 해산시켰다.
이 날 밤 가족은 야음을 틈타 김씨 문중의 또 다른 묘막이 있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율석리로 도망을 쳤다. 그 이후 전쟁이 끝나고 이들 가족은 집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의 와중에 파손됐기 때문이다.
문중 사람들에 의해 유지만 되는 상태창녕위궁재사는 전통한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른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이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사랑채 기둥에 장식으로 붙인 주련이 순조의 세째딸 명온공주와 결혼한 남녕위 윤의선의 글로 알려졌다.
아쉽게도 재사는 입간판 하나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왼쪽 재사 마당은 시멘트로 포장됐으며 장대석 아래쪽으로는 야외
결혼식을 위해 조명과 간판을 달기 위한 철제탑이 미관을 해친다. 마당은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자갈을 깔았다. 시민들은 내력을 적은 입간판 하나 없어 그저 전통 혼례를 위한 한옥쯤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막상 측문에 들어서면 팔작지붕의 기품에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게 되고 편액과 주련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세월을 머금은 기단과 계단, 담 등에서도 나라를 잃고 울분에 떨었던 선비의 항일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