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 而 不 淫, 哀 而 不 傷 ( 즐겁지만 음탕치 아니하고 슬프지만 상심치 아니하다)
by 딕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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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슬픔,즐거움의 근심
휴가철입니다.
모두들 휴가를 떠났는지 아침 출근길이 가볍습니다. 올림픽대로에는 차가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산과 계곡,바다 등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 계신 여러분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자연 속에 닿기까지 당신은 적잖은 교통 지옥에 시달렸겠지만 막상 자연의 품에 몸을 맡겨 보니 빠져 나오고 싶지 않을 겁니다. ‘숲속의 은자’라 불리는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1817∼1862)는 월든 숲 속에 통나무 집을 짓고 2년 여를 살았다고 합니다. 기도와 산책,근검절약으로 두해를 살았던 거지요. 자급자족을 통해 노동과 생산의 귀중함도 알았습니다.
그는 숲속으로 들어오기 전 노예제를 묵인하는 정부에 대한 항의로 징역까지 살았습니다.노예제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중순 취재 때문에 독일의 한 농촌에서 며칠을 묵고 왔습니다. 산과 숲, 그리고 마을 모두가 어찌나 그리 아름답던지…그곳 사람들은 우리처럼 ‘들뜨지’ 않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뭐랄까, 속이 꽉찬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란 생각.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도 자연을 훼손하는 흔적이 없었습니다. 들뜨는데 익숙한 우리는 그런‘작은 행복’을 곧잘 놓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언 14:13)

고 말씀하셨습니다.

혹,당신께서는 자연에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되면 이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피조물인 이상 슬픔과 근심을 떨쳐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시고 어머니를 그러워하던 아이의 시절을 추억하시고 자연의 품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by 딕페 | 2005/12/18 09:36 | 트랙백
어느 곳에서 이별을 하랴
부모를 따라 죽으려고 한 효자도 있었고
아내가 죽어 너무도 어이가 없어 물동이를 치고 노래부른 남편도 있었고
친구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친구도 있었고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고 숯을 먹고 벙어리까지 된 충신도 있었고
남편의 시체를 찾으려다가 성이 무너져 죽은 아내도 있었고
심지어 나라를 위해 제 몸이 망가져 죽은 뒤에야 나라 일을 그만 두겠다는 신하까지 있었으나
이미 죽은 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
이러고 보면 죽고 사는 이별 마당에서 죽은 자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다고 할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글 「어느 곳에서 이별을 하랴」의 한 대목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물동이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한들 그가 살아날 것입니까.
애간장을 녹이며 헤어지는 생으로 태어난 우리 입니다.

세상 사람 대개는 이 창자를 끊는듯한 이별의 원인을 자신에게 찾거나,
아니면 그 죽음 한 번의 경험으로 깊은 절망에 빠져 생의 구원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절대적 힘에 의지하고 맙니다.
옛 사람들이 유난히 자연을 숭배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이겠지요. 그 누구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잠 18:14)는 말씀을 되새겨 보십시오. 이별의 상처는 심령이 낮게 하십시다. 부모가,아내가,연인이,친구가 죽었다해서 상처를 입을만큼 슬퍼하지 마십시오.

심령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로 그가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를 다시 그의 나라로 보내셨습니다.
by 딕페 | 2005/12/18 09:34 | 트랙백
생육하는 모든 것의 장점과 강점
 
양귀비 꽃은 지상의 어떠한 꽃보다도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선홍색 피보다 더 붉고 선동적인 이 꽃을 우리는 흔히 앵속,아편꽃이라고 부르지요.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황후이며 최고의 미인이었던 양귀비에 비길 만큼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곡물과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가 저승의 지배자인 하데스(Hades)한테 빼앗긴 딸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찾아 헤매다가 이 꽃을 꺾어서 스스로 위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편을 담배와 함께 피면 마취 상태에 빠져 몽롱함을 느끼고 습관성이 되면 중독 현상이 나타나며 심하면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지난 여름 독일의 어느 시골을 여행하다 양귀비꽃을 보았습니다.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는데 그곳 밀밭 사이사이에 참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동행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무슨 꽃이냐?”고 했더니 앵속이라는 겁니다. 당나라 현종의 비인 양귀비는 도대체 얼마나 예뻤기에 이 꽃에 비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 있는 만물은 저마다 내세울 장점과 강점이 있습니다. 아침에 수정보다 아름답게 피는 나팔꽃,장독대 옆에 낮게 핀 채송화,서원 마당에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있는 배롱나무꽃, 심지어 꽃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도 향기로 제 장점을 드러내는 아카시아꽃 등 하많은 꽃들과 생육하는 모든 만물이 장점과 강점을 갖추고 있지요. 제게도 그런 장점과 강점이 있으리라,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장점과 강점으로 인해 죄가 범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죄악은 사람의 약점이나 단점 때문에 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장점과 강점을 믿고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더불어 겨누어 보려고 한답니다.

‘죄의 궁극적인 모습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일이다’라고 신학자 지동식 교수(전 연세대 신대)가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는 것들의 ‘장점과 강점’은 영화며 절정일 뿐이지 창조주를 대적하거나 상대를 섬멸하는 무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모두는 어떠한 형태로든 장점과 강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by 딕페 | 2005/12/18 09:33 | 트랙백
폭설, 교회 가는 길
 

  저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의 한 대학에서 연수 중입니다. 여건이 허락되질 않아 다른 가족은 한국에 남겨두고 둘째 딸만 데리고 살고 있습니다.


    [사진설명] 폭설이 내린 주일 아침. 사람들은 저마다 두터운 방한복을 입고 총총히 지나간다. ⓒjhjeon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니라」(약 3:8).

 

2005년 12월4일 주일 예배의 본문입니다.

  저는 이 한 구절로 인도하심을 받고자 그 폭설이 내린 아침을 눈보라 속에서 서성였던가 봅니다. 이국의 땅에서 맞은 주일 아침. 한인교회를 처음 찾아가기로 한 날인데 공교롭게 전날 밤부터 쏟아진 폭설로 시내 교통이 마비가 됐습니다.

 딸과 저는 중무장을 하고 8차선 도로 위에서 간간히 한대씩 지나는 택시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오는 택시마다 손님들을 태우고 있어 쉽게 잡히질 않습니다. 폭설은 여전히 계속되고 눈보라까지 칩니다.

 딸 아이는 자신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도로 위를 신나게 밟으며 즐거워 합니다. 한국에서 이만큼 눈이 왔다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폭설입니다.

 사실 딸 아이가 주일 늦잠도 마다하고 저를 따라 나선 이유는 교회에 간다는 기쁨보다 교회에 가면 한국 채널이 나오는 TV를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서 입니다. 교회에 설치된 위성 수신장치를 통해 한국 프로그램 시청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침 8시 집을 나섰지만 30분이 넘도록 차는 잡히지 않고 눈보라만 계속됩니다. 딸은 그 사이에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재현이라도 하듯 눈을 뭉쳐 제게 던지기도 하고, 눈 침대라도 되는 냥 큰 대자로 누워보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을 겨드랑이에 낀 채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꼽은 손으로 딸의 모습을 찍어 주었습니다.

 눈 오는 도로 위에서 마음껏 노는 딸 아이와 시간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택시는 잡히지 않습니다.

 걸어 가는 것은 너무 멀어 무리입니다.

 『아빠, 난 안 갈래. 추워서 못 기다리겠어.』

 지친 아이는 제 승낙을 재촉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설득하고 다시 눈보라 속에서 나타난 택시를 주시하지만 역시 손님이 타고 있습니다.

 결국 아이를 집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계속된 눈 때문에 저는 이미 눈사람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차는 오지 않고 왔다고 해도 빈 차가 아닙니다.

 그러기를 20여분.

 손님을 태운 택시가 제 앞에 섭니다. 저는 목적지 시러우(西樓)를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방향이 같아 합승을 하게 됐습니다. 중국에 들어와 처음 해보는 합승입니다. 이곳은 한국에서처럼 합승을 강요하지도 않고, 손님들도 합승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만 이날은 눈 탓에 합승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도착하니 10시 예배가 11시로 늦춰졌다고 합니다. 모두들 저처럼 교통편이 없어 길 위에서 헤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침 11시.

 조선족 성도 10여분과 함께 예배가 시작됐습니다. 반주자가 없어 찬송가 자막을 보고 찬양을 하는데도 조선족 할머니들의 편안한 찬송이 눈 오는 아침의 평화를 더욱 느끼게 합니다.

 창 밖에는 여전히 굵은 눈방울이 음표가 되어 화음을 이뤄냅니다.

 이곳은 드러내놓고 예배를 볼 수 없는 중국이며, 이웃의 눈치를 봐가며 예배를 드리는 가정교회 입니다.

 

 

by 딕페 | 2005/12/05 17:21 | 부생(浮生) | 트랙백
웨딩홀된 근대의 유산

△ 서울 번동 드림랜드 왼쪽에 자리한 창녕위궁재사. 전통혼례식장으로 사용된다. jeon jeong hee ⓒ

보아라, 조선 선비의 기개를


구한말 조선 선비의 정신을 드러내는 공간「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드림랜드 앞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시 강북구 번동 93번지가 정확한 주소다.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는 어디에 있을까?

2003년 한 여름 창녕위궁재사를 찾아 드림랜드 앞을 갔을 때 그곳을 찾지 못해 적어도 두어 시간을 헤맸다. 드림랜드 입구 슈퍼와 간이매점을 운영하는 주인에게 『혹시 이 부근에 창녕위궁재사라고 모르십니까?』하고 묻자 창녕위궁재사라는 낯선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내게도 입에 익지 않은 「창녕위궁재사」라는 단어가 쉽게 들어오겠는가. 다시『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라는 설명을 곁들였지만 『글쎄요, 모르겠네요. 그런 게 있나?』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함께 간 중학교 1학년의 딸은 『아빠, 잘못 온 것 아닐까』하고 다른 곳으로 가볼 것을 권했다. 자료에는 분명 놀이공원「드림랜드 앞」이라고 되어 있으니 틀림없겠다 싶어 그곳을 지나는 나이든 주민에게 물어봐도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다.
이럴 땐 복덕방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사무소 개념이 아닌 나이 든 노인들이 소일거리로 열어놓은 복덕방 말이다. 그런데 첫 번째 복덕방은 문이 굳게 잠겼다. 아마 손님을 데리고 어디 월셋집이라도 구경시켜주러 갔는 모양이다.
별 수 없이 이웃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찾으니 30대쯤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근무를 하고 있었다. 「번동 93번지」의 위치를 찾고자 한다고 말하자 벽에 붙은 관내 상세도를 살펴 주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93번지 표시가 없다. 난감하다. 자료를 내밀었다.
『일반 주택이 아닌 창녕위궁재사라는 곳을 찾습니다. 이 자료에는 드림랜드 앞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 앞을 헤매고 다녀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 한옥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몇 년을 이곳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들어봅니다. 』
다른 복덕방이나 공인중개사사무실을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인사를 하고 나오려 하자 뜻밖에 더 젊어 보이는 직원이 『혹시,드림랜드 앞에 한옥이 하나 있긴 한데 그거 아닐까요? 웨딩홀 건물이거든요』라고 말했다.
직감적으로 「찾았다!」싶었다.

창녕위궁재사, 화려한 놀이공원 시설에 둘러쌓인 「드라마 세트장」같은 초라함

드림랜드 입장표를 끊는 정문 왼쪽으로 「드림랜드 전통혼례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ㄱ자 모양의 한옥 지붕이 보이고, 팔작지붕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이 닫혀 문 밖에서 이리저리 살피니 표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천(梧泉) 김석진(1843~1910) 선생이 경술국치의 울분에 못 이겨 자결한 순국 장소」라고 되어 있다.
옆문이 열려 그곳으로 들어서니 중부지방 한옥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ㄱ자 집 두 채가 우리 한옥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들었다. 다듬은 돌로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두 채의 집이 자리했다. 아래 마당에서 올라서려면 4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와즙 건물로 오른쪽 사랑채의 경우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1575~1642) 의 별장으로 지어진 원형이 지금까지 용케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소에서 항일우국지사 김석진이 자결을 했다.

좌측 건물은 1800년대에 건축된 재사로 재사 정면 안채는 해방후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자료에는 6.25 때 폭격으로 재건축됐다고 하나 후손 김균연씨(서울 창문여고 교장)는『9.28 수복 직후 폭격을 맞아 재사와 사랑채(오른쪽)의 일부가 파손되었을 뿐 원형은 옛 그대로이다』고 증언했다.

세도가 안동김씨가에 시집온 조선 순조의 둘째 복온공주

창녕위궁재사의 내력은 이러하다.
안동김씨의 영향력은 19세기초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의 등장 후 이른바 세도정치라는 외척에 의한 정치행태를 낳는다. 이러한 안동김씨의 권력은 흥선대원군조차 안동김씨로부터의 화를 피하고자 반정신병자 행세를 할 정도로 막강해 진다.
정조가 죽고 12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한 순조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따라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는데 이가 바로 복온공주의 어머니 순원왕후이다. 순원왕후는 후에 익종이 되는 효명세자와 그 아래로 명온 복온 덕온 공주를 둔다.
창녕위궁재사는 바로 이 둘째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의 재사이다. 순조는 안동김씨 가문의 실력자 김연근의 아들 창녕위 김병주(金炳疇 1819~1853)를 부마로 맞았으나 그 딸이 불과 15세의 나이로 일찍 죽자 이곳에 능과 재실을 마련했다.
당초 이 재사와 이 일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신경진의 별서였으나 이후 병조판서,한성판윤을 역임한 무신 이요헌(1766~1815) 소유로 넘어왔다. 이요헌은 이곳에 삼벽정(三碧亭)을 이곳 짓고 시와 독서를 즐겼다. 그리고 복온공주의 묘소로 정해진 후 제실(묘막)이 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창녕위-복온공주 후손 김석진의 순국으로 이어지다

재실 이전 이 지역은 신경진,이요헌 등이 소유한 정자가 있는 별장이었기 때문에 정자말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재실과 공주릉이 들어서면서 궁말 또는 공주릉으로 호칭된다.
정자말로 불리기 앞서는 「벌리」라 하였다. 벌리란 고려 시대 목(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도참설이 떠돌면서 목씨 성을 오얏나무 이(李)씨 성으로 보고 오얏나무가 무성한 이 일대에 벌리사(伐李使)를 두어 그야말로 오얏나무를 쳐냈다.
따라서 마을 이름도 벌리(伐李)가 되었다가 나중에 번리(樊里)로 고쳐졌다고 향토사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지금의 번동의 유래인 셈이다.
한적한 재실에 지나지 않았을 이곳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후손이자 우국지사인 김석진(金奭鎭)이 이곳에 은둔 끝에 경술국치의 분을 토하고 자결하면서부터이다.

안동김씨 가문으로 안동에서 태어난 김석진은 철종 11년(1860년)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해 종실의 계보와 초상화,의복 등을 관리하는 종친부 관리로 일하다 홍문관,한성부 좌윤,광주부유수 등을 지냈다. 그리고 갑오개혁 때 설치된 궁내부 특진관을 시작으로 비서원,장례원 등에서 종실의 의례 등을 관장하는 벼슬을 거쳤다.
마지막 관직인 판돈녕부사 역시 돈녕부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예우하는 기관이었고 그는 돈녕부의 수장이었으므로 죽기 전까지 왕실의 권위를 지키는데 헌신했다.

이러한 그에게 1905년 을사조약은 경악할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즉각 상소를 올리고 조약을 날인한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이근택 등 5적의 처형을 주장하고 이곳 재사에 은둔을 시작한다.
일제는 이런 그에게 남작 제의를 하나 거절하고 오히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자 소유하고 있던 지금의 서울 한국일보 건너편 땅을 팔아 빚을 갚는데 보탰다고 전한다.

그러나 한번 기운 국운은 끝내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로 이어지자 그는 재사의 사랑채에서 음독 자결로 항일의 뜻을 분명히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의 유림들은 그의 아들 김녕한(金寧漢 1878~1950)을 중심으로 그의 순국을 사표로 삼아 강연과 집회 등을 가지며 애국운동을 펼친다. 이제 재사는 전국 유림 제일의 성지가 되어 수만 명이 왕래하기에 이른다.
이에 당황한 왜경은 유림 영수 김녕한을 감시할 목적으로 마을 어귀에 초소를 세워 그와 유림의 동태를 파악했다.
김석진과 김녕한 등 후손들 또한 복온공주릉 인근 사묘에 묻혔으나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번잡해 지자 후손들이 2002년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으로 이장을 한 상태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석진 선생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 훈장 복장을 추서했다.

재사, 1950년 「번동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쓰여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재사다. 고조부께서 자결한 사랑채는 할아버지와 같이 잠을 자는 침실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집은 산속 외딴 집이었다. 지금 드림랜드 입구 보호수로 지정된 18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 당시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는 어른 팔 둘레로 일곱 둘레에 달했다. 아쉽게도 6.25 때 폭격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
후손 김균연씨의 증언이다. 6.25 발발 당시 경동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순식간에 서울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이 재사를 접수해 인민위원회로 사용하면서 채석업을 하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인민재판에 회부됐다.

바지에 파란 줄을 한 내무서원, 빨간 줄을 한 군관 그리고 민청 사람들이 3대를 재판에 회부하고 『당신들이 인민의 고혈을 착취한 지주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의 할아버지가 『우리는 농사를 지어먹고 산 죄 밖에 없다』고 답변했다. 김씨는『그들은 재사 아래 방죽 위에서서 이같이 심문했고 나와 우리 가족은 방죽 위에선 그들을 올려다보며 재판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마침 전쟁 초기이고 인민에 과도한 해를 끼치지 않도록 교육받은 그들이었기에 『내일 다시 이 자리에서 재판을 속개하겠다』며 해산시켰다.

이 날 밤 가족은 야음을 틈타 김씨 문중의 또 다른 묘막이 있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율석리로 도망을 쳤다. 그 이후 전쟁이 끝나고 이들 가족은 집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전쟁의 와중에 파손됐기 때문이다.

문중 사람들에 의해 유지만 되는 상태

창녕위궁재사는 전통한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른 조선 후기 목조 건축물이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사랑채 기둥에 장식으로 붙인 주련이 순조의 세째딸 명온공주와 결혼한 남녕위 윤의선의 글로 알려졌다.
아쉽게도 재사는 입간판 하나 제대로 서 있지 않다. 왼쪽 재사 마당은 시멘트로 포장됐으며 장대석 아래쪽으로는 야외

결혼식을 위해 조명과 간판을 달기 위한 철제탑이 미관을 해친다. 마당은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자갈을 깔았다. 시민들은 내력을 적은 입간판 하나 없어 그저 전통 혼례를 위한 한옥쯤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막상 측문에 들어서면 팔작지붕의 기품에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게 되고 편액과 주련에서 무언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세월을 머금은 기단과 계단, 담 등에서도 나라를 잃고 울분에 떨었던 선비의 항일 정신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by 딕페 | 2005/08/27 18:05 | 트랙백 | 덧글(1)
파주 「5895부대교회」,소박함에 천사날개 달기

△파주출판산업단지의 배경이 되는 「5895부대교회」. jeon jeong heeⓒ

아름다움은 멀리 떨어져서 봐야한다

세계적 건축물 중에 하나인 호주 시드니오페라하우스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저는 그 명소를 가본 적이 없고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인데 사람의 힘으로 어찌 저렇게 아름답게 건축할 수 있나 싶습니다.

덴마크 건축가 외른 오베르그 우드손이란 사람의 작품으로 1957년부터 16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됐습니다. 미항 시드니 바닷가에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 무엇보다 바다라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배경으로 자리해 더욱 아름다울 겁니다. 또 멀리서 봐야 더욱 참 멋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오페라하우스가 있다면…아무래도 그 아름다움이 반감될 겁니다.

이처럼 자연은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하고, 소박한 것에는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고, 추한 것은 부모의 마음처럼 감싸줍니다.

5월이 사파이어보석만큼이나 빛이 나던 날. 저는 경기도 파주 출판산업단지를 구경하다 「소박한 것에 천사의 날개」를 달아준 풍경을 보았습니다. 출판산업단지를 감싸는 산자락에 침정함을 이끌어내는 교회. 속박을 받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한운야학(閑雲野鶴)의 그림이었습니다.


멀리서 풍경을 보다가 한 달음에 달려가니, 흠-아쉽게도 군부대교회였습니다. 5895부대교회라고 칭해야겠지요. 가까이서 보고 싶어도 초병이 막아서니 도리가 없지요. 미인은 이렇게 멀리서 봐야 하는 모양입니다.

먼발치지만 성서를 손에 쥔 군인들이 교회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릅니다. 실록이 온통 교회를 감쌌고 교회는 학처럼 그렇게 정채함으로 남아있습니다. 교회 언덕에서 보면 자유로와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올 겁니다.

훈련에 지치고, 조직생활에 습기를 빼앗긴 군인들에게 교회는 영의 양식일 겁니다.

10년 전이었지요. 해병대의 초대로 서해바다 백령도의 군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늦은 밤 군부대내 제 숙소로 메시지가 전달됐습니다. 군목께서 저를 찾는다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찾을 사람이 없는데 누군가 궁금했지요.

알고 보니 학교 후배였습니다. 군목이 된 그 친구는 그 멀리 백령도에서 십자가군병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후배의 관사를 방문해 식사 대접을 받았습니다. 자그마한 관사에 꼭 필요한 것만 놓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참으로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영내 군인교회로 향하는 자그마한 길 양쪽으로는 꽃들이 만발해 군부대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저 평화가 임한 공간이었을 뿐이지요.

모든 교회는, 특히 군인교회는 그렇게 총구에 꽂힌 장미꽃처럼 화평케 하는 메신저입니다.


▷ 5895부대 가는 길
서울에서 자유로를 따라 파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자유로휴게소 간판이 나온다. 이 휴게소 길로 들어서면 [파주출판산업단지]가 펼쳐지고 멀리 산자락에 교회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군인교회라 들어갈 수는 없지만 잘 계획 조성된 단지 내에서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등을 즐기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특히 이 산업단지는 아름다운 갈대숲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건물과 공연·전시공간을 곳곳에 두고 있어 문화단지로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그 잘 가꿔진 문화공간 산자락에 교회가 그림처럼 걸려있다.
by 딕페 | 2005/08/27 18:00 | 트랙백
동시베리아 「자작나무 교회」

ⓒ jeon jeong hee

지난 추석 무렵 동시베리아 지역의 바이칼호수를 다녀왔습니다. 지도상으로 몽골 위쪽에 위치한 바이칼호수는 유라시아대륙에서 세번째로 큰 호수이자 담수호로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호수이기도 합니다.

그 지역의 민속박물관 일이 있어 간 것인데 뜻하지 않게 좋은 관광을 하게 됐습니다. 바이칼호수의 중심 도시는 이르쿠츠크라는 곳이 있습니다. 60여 만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동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이지요.

저희 일행은 바이칼호수를 끼고 있는 그 도시 민속박물관에서 뜻하지 않은 아름다운 교회를 보게 됐습니다. 시베리아에선 가장 흔한 것이 자작나무여서 그 나무를 다듬어 지은 교회였습니다. 우리로 치자면 용인민속촌의 한 옛 건물과 같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민속박물관에 사료로서 서 있다니요? 그곳 박물관장의 얘기로는 동방정교회가 이 도시에 정착할 즈음의 교회 모습이라고 합니다. 바이칼호수에 석양이 질 무렵 이 교회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행하시는 곳엔 척박한 조건에도 이렇게 성도들의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교회가 자리 합니다.

그런데,1917년 구소련이 공산화되고 신앙의 자유가 박탈되면서 교회는 문을 닫게 됩니다. 2차대전 무렵 나치의 침략을 견디다 못한 스탈린이 교인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정교회에 다소나마 자유를 주지만 손발 묶은 자유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교회를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정교회는 되살아 났습니다. 이르쿠츠크를 여행하면서 정교회 성전에서 예배를 집전하는 모습을 여러번 보곤 했습니다. 선교 활동이 급격히 되살아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사 분도 한 분이 열심히 사역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추운 도시에 20여 명이나 되는 유학생이 있더군요.

공산화후 극장이나 집회 장소로 쓰였던 정교회 건물은 모두 성소의 기능으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의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씀처럼 『하나님, 주님 안에서 쉴때까지 내 영혼은 어쩔 줄 몰라 하나이다』하는 성도들이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딘 이유에서지요.

주님이 거할 처소야 마굿간인들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권능과 사랑을 믿고, 그를 섬길 뿐입니다. 동토 시베리아에 지금 복음의 열기가 후끈 합니다.

by 딕페 | 2005/08/27 17:56 | 트랙백
인도선교여행⑥ / 공포와 실망…그러나 희망을 쏘다

ⓒjeon jeong hee 설교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들. 그들은 신성을 보았을 것이다.


꿈이 있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 ‘역사’는 바뀝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 된 후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과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기에 급급해야 했습니다. 어디서 어떤 폭압과 모함이 들어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를 그런 공포감이 엄습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너희의 악함을 고하노니 너희가 그 죗값을 크게 치르리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침묵과 절망감. 짙은 안개가 밤 사이 뱀처럼 사람들 마음 구석구석에 스며들듯 그렇게 공포와 실망에 점령당했다고 봅니다.

“아니,어떠하신 분인데 십자가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 간구하면 땅과 하늘이 갈라지며 사악한 무리들을 물리치실 걸로 그들은 믿었습니다. 희망이 산산 조각난 셈이지요. 영생을 믿었던 그들인데 사사여생(事死如生)의 어려움에 처할 줄은 몰랐겠지요. 그들은 결국 사사여생은 고사하고 바람 앞의 풀보다 빨리 눕고 말았습니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가 말했습니다.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성도들은 희망을 놓아버렸지요.

인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쉽게도 희망의 선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절망한 사람들의 얼굴 빛…초점 없는 눈은 안타깝기까지 했습니다. 인도 동남부 도시 첸나이는 도마가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도는 지금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 있습니다. 구원이 없고 부활이 없으니,미물로 윤회하지 않기만을 바라지요.
다행이 요즘 들어 예수가 죽은 후 사흘째 되던 날 무덤에 갔던 부녀자들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벌써 얼굴 표정부터 다릅니다.

강림할 성신의 힘을 믿는 것이지요. 되돌아보면 우리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 된 다음 흙빛 얼굴에 화색이 돌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리어카를 끌며 행상을 하더라도 희망을 품었다면 그의 얼굴에는 성령이 임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로또 복권을 한 장 산 후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희망의 얼굴은 얼마나 갑니까?길어야 2주일 이라고 봅니다. 역전에 실패하면 또 마약 복용하듯 복권을 다시 사서 흙빛과 화색을 반복할 겁니다.

‘희망’

인자한 예수의 얼굴을 보셨습니까?여러분 얼굴에 희망의 선이 나타납니까?저도 거울을 찾아봐야 겠습니다.

by 딕페 | 2005/08/27 17:52 | 트랙백
인도선교여행⑤ / 그들의 아침, 양분의 근원

jeon jeong heeⓒ

11월 이른 아침 벵골로르의 날씨는 참으로 신선합니다. 선선한 시간에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하기 위해서 열심히 움직입니다. 낮시간엔 너무나 덥기 때문이지요.

이들의 생활을 접하기 위해 골목 곳곳과 시장을 돌아다녔습니다. 10억이 넘는 인구 탓인지 어디가나 사람들로 차고 넘칩니다. 시내에는 우리나라가 생산한 대우 마티즈와 현대 아토스(산트로라고 불리더군요)가 거리를 누빕니다. 시내 도로에는 주로 화물트럭이 다니는데 그 화물 트럭 사이에 마티즈와 산트로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경차인 두 종류의 차가 그들에겐 부를 상징합니다.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탈 수 없는 차지요.

삶의 모습은 어느 곳이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습니다. 도시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건 순박하기 마련이지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이곳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결속 보다 우상과의 결속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양분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서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요한복음 15장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서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5∼6)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그들의 아침과 낮과 밤이 존재하기를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들이 항상 이 아침의 신선함처럼 평화롭고 평온하길 바랬습니다.

과일을 사고 파는 주인과 손님
행상의 소년
카메라 앞에 선 어린이들
물장수 아저씨
이른 아침 길을 나선 모녀

그들에게 복음의 기회가 주어져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는 고백이 이어지길 원합니다.

인도는 그렇게 선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지배하면서 식민정책을 우선에 두고 선교를 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영웅 간디가 그렇게 크리스천을 미워하지 않았을 테고 그로 인해 우상도 많이 줄어들었겠지요.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변화와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를 읽었겠지요. 다행히 인도의 선한 사람들에게 한국의 선교사님들이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사님들은『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신선한 아침의 복음을 전합니다. 아침에 마주치는 그들의 모습은 모두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by 딕페 | 2005/08/27 17:51 | 트랙백
생은 모질다

인도 벵골로르시 빈민가를 방문한 정운삼 선교사(오른쪽). 군목출신 목사님이 「우리 6.25때도 이보다 가난하지 않았다 」며 눈뜨고 보기 힘든 가난을 안타까워했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경찰의 도움을 받아 빈민촌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생은 모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오그라질 것 같은 더위와 석회석만 가득해 물조차 먹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을 딛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불편하지만 평온하게 살고 있다. 어느 날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남루한 어린이가 소젖에 직접 입을 대고 생우유를 먹는 것을 보았다.

프로듀서가 그 부모에게 “배탈이 나거나 병에 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부모는 “없어서 못 먹는다”고 말했다. 맞다. 척박한 땅에서 그 덩치 큰 소도 빼쩍 마른 마당에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태양 아래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 광합성 작용을 하는 식물 죄다 생존한다는 것이 고통이다. 적어도 사시사철 옷을 바꿔입을 수 있고,따뜻한 밥과 국으로 배고픔을 모르는 내게는 그렇다.

아스팔트와 도시 숲에 익숙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면 목구멍에 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처럼 가난한 시절을 분명 겪었는데도 몸은 소지무여(掃地無餘)한 것처럼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길거리에 다니면 아이들이 졸졸 따라온다. 이방인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무엇 하나라도 얻어 먹기 위해서다. 그런데 주머니엔 비행기 안에서 받아 놓은 사탕 몇 알만이 있을 뿐이다. 손을 넣어 만지작 거렸을 뿐 밖으로 꺼낼 수 가 없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그들보다 겨우 사탕 두알이 더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구제란 얼마나 허무한가. 그들에겐 ‘일용할 양식’만 보일 뿐이고 내게는 ‘일용할 양식’을 대줄 힘이 없다. 한 두사람에게 몇끼의 양식은 도와줄 능력이 있지만 만지작 거리는 사탕 두개처럼 ‘덮칠 가난한 손길’이 두려워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굶어죽지 않는다. 벼농사 지을 때 우리가 뽑아 버리는 ‘피’라는 식물의 열매도 수확해 요긴하게 먹는 그들이다. 그들은 지금 어쩔 수 없이 모질게 산다. 그리고 어느날 가난했던 옛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복음의 양식이 필요하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이 하루 빨리 자립하자면 복음은 거름과도 같다.

다행히 인도는 소말리아와 같은 기근에 휩싸여 있지는 않다. 다만 척박할 뿐이다. 그래서 벌리는 손마다 빵을 쥐어 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실은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by 딕페 | 2005/08/27 17:47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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